
전시
상설 전시실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에 대해 최초의 세례자, 조선천주교의 반석, 순교자라는 실제적 사실과 그 과정에서의 인간적 고뇌, 대를 이은 후손의 순교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을 소개, 천주교 신자로서 이승훈 뿐만 아니라 혼돈의 시기를 살아낸 인간 이승훈에 대해 공감과 울림을 전합니다.
Permanent exhibit
조선 후기 서학으로 연구되던 천주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중국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귀국 후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복음 전파에 힘썼던
이승훈의 삶을 소개하고, 북경의 구베아주교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으로 가성직제도의 문제점을 반성하고 사제파견을 요청하여 참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던 이승훈의 진정성을 들여다봅니다.
을사추조적발사건, 정미반회사건, 진산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에서 겪었던 이승훈의 갈등과 고뇌를 이해하고, 결국 신유박해 때에 순교함으로써 신앙을 증거한 이승훈의 마지막을, 고향 선산에 소박한 지석과 함께 묻힌 그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이승훈 집안은 4대에 걸쳐 8명이 순교하였으며, 특히 셋째아들 이신규는 인천지역에서 의술을 펼치며 지역에 기여하는 삶을 살다가 순교한 이후 아버지 이승훈의 묘 바로 아래에 함께 묻히는 등, 평창 이씨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선조들의 삶을 기리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종친회에서 제공한 가계도와 족보 등의 자료를 통해 살펴봅니다.
끝으로 인천교구의 또다른 순교성지들을 소개함으로써 이승훈 베드로에서 시작하여 면면히 이어져온 순교와 신앙의 증거들을 함께 돌아볼 수 있도록 합니다.

‘하느님의 종’ 이승훈(李承薰)베드로의 길
한국 천주교는 외국인 선교사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서학을 접한 선각자가 중국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그가 바로 '이승훈 베드로' 입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신자이기 전에 진리를 추구하는 학자였고
유교적 전통을 숭상하는 양반의 자손이었습니다. 결국 순교로 마감한 그는 심대한 지적 갈망,
천주교를 향한 헌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개척한 선구자의 고뇌로 이어진 풍랑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이승훈의 여정을 ‘학문’, ‘신앙’, ‘갈등’, ‘순교’라는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의 종 이승훈 베드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 조선후기 서학의 전래
조선 초기 천주교 신앙은 선교사 파견 없이, 독자적으로 생성해서 주체적 신앙 인식의 양상으로 발전한 유일무이한 경우였다.
2.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베드로

17세기 초 조선에 들어온 서학(西學)은 18세기 무렵,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차 관심이 커졌다. 유학자들은 서학서를 소장하고 연구하며 강학 모임에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논의했다.
강학회의 개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은 주로 사찰에서 강학 모임을 열었으며 주어사와 천진암이 주된 장소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약용의 기록에 따르면, 1779년 주어사 강학회에는 권철신, 정약전,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이 모였고 이벽은 뒤늦게 참가 하였다.
또한 이들 외에 이승훈이나 정약전·정약용 형제가 강학에 참석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서학 연구는 조선 사회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 탄생으로 이어진다.
3. 신앙공동체 설립과 천주교 전파

자생적 신앙 공동체 설립
1784년 3월 말, 이승훈은 서양의 각종 기기와 천주교 서적, 십자고상과 성화, 묵주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이승훈은 이벽에게 서적을 빌려주었고 이를 탐독한 이벽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승훈과 이벽은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전하며 천주교 신앙 공동체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784년 겨울, 이벽은 정약용, 권일신 등 약 10명과 함께 서울의 수표교 근처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태어났다.
이렇게 조선은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자발적인 의지와 결정으로 서학을 연구하며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평신도에 의해서 출발해 평신도를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자라난 조선 천주교회는 숱한 박해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초기 조선 교회는 '평신도 사도직 운동'의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조선교회의 탄생 소식
1790년 10월 6일, 북경교구의 구베아(Alexandre de Gouvea) 주교는 포교성성의 안토넬리(Leonardo Antonelli) 주교에게 이승훈이 조선인들에게 세례를 주어 조선 교회가 탄생했다는 서한을 보냈다.
중국 만주에 접한 조선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갔다는, 성 교회를 위해 실로 기쁜 광경이 이곳 북경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 1784년에 조선 왕국의 한 사신의 아들이 수학(學)을 배우려는 소망에서 서양 선교사 학자들로부터 교리를 듣고, 또 수학에 관한 책들을 얻으려고 북경의 성당을 찾아왔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은 그 조선 사람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면서 틈틈이 그리스도교의 기초 교리를 가르치는 데 마음을 썼으며, 그 교리가 담긴 책들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이 주효하여 그 사람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청했으며, 사신으로 온 아버지의 승낙과 동의를 얻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새 신자는 그해에 자기 나라로 돌아갔는데, 성은 이가(李哥)이고 베드로라는 본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천주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그의 동포들의 전도사가 되어, 몇 사람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개종시키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 다시 전도사들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베드로보다 더 열심해져서 머지않아 1,000명이 넘는 남녀 동포들이 세례를 받고, 새 조선교회를 세웠습니다(최석우 역, <이승훈 관계 서한 자료>, <교회사연구> 8, 1992, 182~183쪽).

4. 명례방 모임
집회 인원이 증가하자 김범우의 집인 명례방(明禮坊, 지금의 明洞)으로 모임 장소를 옮겼다.
5. 가성직 제도 (평신도 임시 교계제도)
이승훈은 가성직제도를 실시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 시켰으나, 잘못된 것을 알고 바로 성사를 중단하며 그 죄를 고백하였다.

조선 천주교회는 창설 이후 교세가 계속 성장하였고 이승훈, 이벽, 권일신은 교회의 터전을 확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785년 봄 을사추조 적발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도 교세는 지속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상황에서 북경 성직자들의 성사 집행 광경을 보고 온 이승훈은 효율적인 선교와 신자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한 대책으로 조선 천주교회에도 성직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리하여 1786년 가을 그들은 북경교회와 유사한 형태로 사제단을 구성하고, 교리서에 적혀 있는 다양한 성사들을 성직자의 집전하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먼저 이승훈이 신부로 선출되었고, 그는 신심과 학식, 그리고 덕망이 높은 신자 10명을 뽑아 신부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미사를 거행하고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이같은 가성직 제도로 인해 신자들은 교리와 전례를 통하여 좀 더 생생하게 천주교를 이해할 수 있었고 교세는 더욱 확산되었다. 이승훈의 서한에 따르면 1789년 신자들의 수는 1,000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6. 성직자 영입 운동
김현철
첫 번째 신부 주문모의 조선 입국
1791년 2월, 레메디오스(Johanne dos Remèdios) 신부가 조선으로 파견되어 변문에서 조선 신자들과 만나기로 했으나, 신해박해의 어수선한 상황으로 인해 조선 교회에서 사람을 보내지 못해 계획은 무산되었다.
1793년, 윤유일과 지황이 다시 북경으로 가서 사제 파견을 요청했고, 이에 주교는 학문과 인품을 갖추고 조선 사람과 비슷한 풍모를 지닌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보내기로 하였다. 이에 1794년 12월 3일,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로 첫 번째 신부, 주문모 신부가 드디어 조선에 입국한다.
을묘실포사건 (乙卯失捕事件)
주문모 신부는 서울 북촌(北村) 최인길의 집에 머물면서 그로부터 언어를 배웠고 1795년 4월 5일 부활대축일에 그곳에서 한국 교회 최초의 미사를 봉헌했다.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시작하자 이승훈도 다시 교인들과 접촉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으나 신입교우 진사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를 밀고하여 체포령이 내려졌다.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지만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체포되어 1795년 6월 28일 순교했다. 을묘년(1795년)에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이른바 을묘실포사건으로 인해서 이승훈, 이가환, 홍낙민, 김종교, 허속, 황사영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고,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주문모 신부의 선교활동과 순교
주문모 신부는 제약 속에서도 신자들의 보호를 받으며 계속 활동했고 교회는 점차 활기를 띠게 되었다.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열심히 전교에 힘을 쏟아 여주, 고산, 공주, 온양, 내포, 남포 등 지방을 순회 전교하였다. 정약종을 회장으로 명도회를 조직하여 교리연구에 힘썼으며, 강완숙을 여회장에 임명하여 여성 교우들의 신앙 활성화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주문모 신부의 노력으로 입국 당시 4,000명이었던 신자 수가 1801년에 1만 명으로 늘어났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5월 31일(음력 4월 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형으로 순교하였다.


7. 갈등과 핍박
을사년의 적발사건, 정미년의 반회사건, 진산사건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상황에서
이승훈은 각종 상소와 고발로 고초를 당했고, 그 과정에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을사년 봄 이승훈은 정약전, 정약용 등과 함께 중인 김범우의 집에서 설법을 하였다. ……형조의 금리(禁吏)가 그 모임이 술을 마시고 노름을 하는 것인가 의심하여 들어가 보았다. 모두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수건을 썼으며 거동이 해괴하고 이상하여 체포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화상과 서적들, 그리고 몇 가지 물건들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그들이 양반의 자제로서 잘못 들어간 것을 애석하게 여겨서 타일러 보내고, 다만 김범우만 가두었다. (이만채의 <벽위편>)
을사년(1785년) 봄,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갖고 이승훈이 천주교 교리에 관해 강론을 하고 있을 때 형조들의 관리들이 우연히 이를 적발, 모임에 참가한 이들을 체포하고, 천주교 서적과 성화상들을 압수하였다. 이것이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형조판서 김화진은 체포된 이들이 모두 사대부이므로 중인 출신의 집주인 김범우만을 가두고 나머지 사람들을 훈방했으나 권일신은 그의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로 가서 김범우의 석방과 성화상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범우를 간단히 문초한 다음 충청도 단양(丹陽)[경상도 밀양 단장(丹場)이라는 설도 있음]으로 유배시켰다. 김범우는 유배생활 1년 만에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선 천주교회 최초 증거이자 희생자가 되었다.
을사추조적발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이것으로 인하여 조선 천주교회 설립 직후 초기 신자들이 벌인 신앙 운동이 조선 정부와 유교 지식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전부터 서학을 성리학의 정통 가르침에서 이탈한 것으로 비판하던 지식인들은 척사론(斥邪論)을 공론화하기 시작하였다. 안정복은 직접 천주교를 배척하기 위해 『 천학고(天學考) 』, 『 천학문답(天學問答) 』을 저술하였다. 한편 이승훈을 비롯하여 교회 설립을 주도한 양반층 신자들은 가문의 압력을 못이겨 교회로부터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이벽은 부친의 강요로 동료 신자들과 접촉을 끊고 은둔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 외에 정약전, 정약용 현제들과 다른 신자들도 당분간 조심스럽게 행동하거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교회를 멀리하였다. 그 결과 김범우의 집에서 있었던 명례방 신앙모임은 중단되고 말았다.
8. 신유박해와 이승훈의 순교
월락재천 수상지진 ; 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남듯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는다
1801년(신유년) 어린 순조가 임금이 되면서 정권을 잡은 노론벽파가 남인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시작된 박해가 천주교 4대 박해 중 첫 번째인 신유박해다. 신유박해로 대부분의 천주교 지도자들이 순교하는데, 이미 몇 차례 체포와 유배된 이승훈 베드로는 결국 신유박해 때 순교하게 된다. 전승에 의하면, 서소문 형장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는 순교하면서 ‘月落在天 水上池盡 월락재천 수상지진’ (달은 비록 지더라도 하늘에 남듯이 내 신앙은 천주 안에 그대로 남아있고, 물이 솟구치더라도 연못에서 다하는 것 같이 내 신앙은 결국 천주 안에서 다한다)라는 말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승훈 베드로 약력
자 : 자술(子述) , 호 : 만천(蔓川)
1756년
1775년
1779년
1780년~
1783년
1784년
1785년
1786년
1787년
1789년
1790년
1791년
1795년
1801년
부친 이동욱과 모친 여주이씨 사이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정약용의 누이인 나주정씨와 혼인
주어사,천진암 등에서 강학을 통해 천주교를 서학으로 접함
진사시 합격 → 성균관 유생
동지사 서장관에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됨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로 세례를 받아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됨
귀국 후 세례를 베풀고 한국천주교회를 창설
명례방으로 집회 장소를 옮겨 정기적인 신앙모임
‘을사추조 적발사건’으로 잠시 교회활동 중단
활동 재개하며 가성직 제도로 교세 확장
'정미반회사건‘으로 남인계열 내 공서파(攻西波)의 공격을 받게 됨
윤유일 바오로를 특사로 파견하여 북경 선교사들과 교류 (가성직제도등 문의)
윤유일은 주교의 사목서한 가지고 귀국
북경에 윤유일을 재차 파견하여 성직자 영입 요청
관직진출 (의금부도사)
‘진산사건’의 여파로 체포되어 평택현감에서 삭직
‘을묘실포사건’으로 체포되어 예산으로 유배
신유박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 순교 → 평창이씨 선산인 인천 장수동에 묻힘
참수 직전 신앙 고백 "월락재천(月落在天) 수상지진(水上池盡)
9. 4대에 걸친 순교
이승훈(베드로)의 가계도
이승훈(베드로)
나주정씨
1801년
서소문순교, 45세
정약용 의 누이
택규(도밍고)
국규
신규(마티아)
1868년
서소문순교
재종
재의(토마)
재관
1868년
서소문순교
재겸
1868년 체포, 유배
옥사순교
정씨
1871년
제물진두 순교
학호
연구
1871년
제물진두 순교
균구
1871년
제물진두 순교
(손) 명현
1871년
제물진두 순교
한국 교회사에서 순교자의 후손은 대가 끊기거나 신앙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승훈 베드로의 후손들은 100년이 넘는 박해 시기 내내 대를 이어 교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승훈은 순교 후 선산인 장수동 산132번지에 묻혔고, 자녀들은 부친의 묘 근처에 터를 잡게 된다.
이승훈의 셋째 아들 이신규 마티아는 가문의 몰락과 부친의 죽음을 야기한 천주교 신앙을 멀리했으나, 외사촌인 정하상의 집에 왕래하면서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16년(21세)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열심히 신자 생활을 하였고 샤스탕 신부의 복사(服事)가 되어 1년간 전교 길에 동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박해시기에 몇 차례의 체포와 옥살이의 고초를 겪었지만 뛰어난 학문과 의술로 참수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후 영종도와 제물포 지역에서 약국을 개설하여 의술을 펼치며 인천 지역민들을 위해 기여하는 삶을 살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이신규는 무진년(戊辰年)인 1868년 4월, 다시 체포당했다. 배교를 강요하는 관원에게 “내가 이제 나이 70이 넘었는데, 천주를 배반하고 나가서 무슨 일로 영혼을 구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결국엔 4월 7일, 아버지 이승훈이 순교했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이후, 아버지의 묘 바로 아래에 함께 묻혔다.
또한 이승훈의 손자 이재의, 이재겸 그리고 이재겸의 부인 정씨, 증손자 이연구, 이균구, 고손자인 이명현 등 4~5대에 걸쳐 모두 8명이 교회 활동 중에 순교했다. 이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드문 독보적인 경우로, 모진 박해 속에서도 대를 이은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이승훈 집안(가문)의 깊은 신심을 보여준다. 특히 손주며느리 정씨와 증손자 이연구, 이균구, 이명현은 1871년 인천 제물진두에서 참수 당하면서 인천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승훈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천주교회
한국의 천주교 복음 선포는 평신도를 통해 시작되었다.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도착하기 전, 한국에는 이미 평신도들이 이끄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중심에는 이승훈이 있었다.
19세기의 모진 박해를 거친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03위 성인을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가 탄생하게 된다. 그들 중 주교와 신부 등 몇몇 성직자를 제외한 대부분은 평신도들이다. 이들은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피와 목숨으로 한국 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한국 교회는 이들을 기리기 위해 9월 20일을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로 지정하였다.
이승훈 베드로 등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한 신유박해(1801년)를 비롯하여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라는 4대 박해에서 1만 명 내외의 순교자가 나왔다. 4대 박해 이외에도 신해박해(1791년), 정사박해(1797년),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등 크고 작은 박해는 내내 지속되었다. 순교자 중에는 무명 순교자가 많은데 문헌기록이 부족하여 정확한 순교자 수를 가늠하기는 힘들다.

이승훈은 왜 여기에 묻혔나...
인천광역시 남동구 장수동 반주골에는 이승훈 베드로와 아들 신규, 택규의 묘가 있다. 산 밑에 넓게 펼쳐져 새들이 많이 찾아 드는 까닭에 조곡(鳥谷)마을이라 불리던 반주골은 이승훈의 본가인 평창(平昌) 이씨가 대대로 살던 곳이다.
이승훈 베드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한 후 선산인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산132번지 반주골에 묻혔다.
1981년 천진암 성역화 추진위원회에서 그의 유해 이장을 위해 무덤을 열었으나 거의 진토가 되어 있었으며, 수습할 수 있는 유골은 경기도 광주군 천진암 성지로 옮겨졌다.
반주골 이승훈 묘는 이승훈이 180년 넘게 묻혀 진토(塵土)가 된 진묘(眞墓)이다. 2011년 인천시는 이승훈의 업적을 기리고자 이승훈 묘를 인천시 기념물 제63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상설전시실
미디어아트
월락재천 수상지진 (月落在天 水上池盡)
月落在天 水上池盡
새로운 진리를 향한 갈구와 깨달음으로 시작된 이승훈 베드로의 신앙은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수없이 많은 번민의 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처음 천주를 접하고 이를 전파하며 얻게된 환희,
사회적 관습과의 갈등으로 인한 방황과 고뇌, 공동체로부터 멀어지며 맞닥뜨린 혼돈과 고통,
결국 믿음의 길로 돌아와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까지.. 이승훈 베드로의 신앙의 시간들을 시각화와 청각화를 통한 미디어아트로 구현했습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오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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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지능형융합시스템 전공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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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칼스루에 조형대학교(HfG Karlsruhe)대학원 미디어아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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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및 동대학원 졸업(M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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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공간회, 서울조각회, 인천조각가협회, 기초조형학회, IEEE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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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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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독일 PTC GmbH, Du Mont 출판사, 경인교육대학교 등 작품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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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경인교육대학교 미술대학과 교수












